posted by silverstone236 2014. 12. 5. 02:16

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가 서거한 다음 해인 1975년에 위로 격려편지와 전화를 준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 된다, 

한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 6일 이라고 한다.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서 기업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았다,

이에 대해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을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영은 2005년 11월 월간조선의 인터뷰를 통하여 1977년 9월 12일 밤 박정희가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는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김재규의 변호인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항소이유서' 외 '항소이유 보충서' 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하였다, 이 두 서류에 992자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김재규 측은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하였고, 김재규 변호인 항소이유서의 밝힌 최태민 관련 전문은 아래와 같다.

 

피고인 (김재규 본인)은 1975년 5월 구국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연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 란 건의를 받아드리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박근혜,최태민

그리고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 에서 아래와 같이 최태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국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데,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본인은 백관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헤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김재규 측에 이러한 증언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최태민을 수사를 하였던 박광현은 김재규가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한 최태민 사건은 김재규가 억지로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하였을 뿐이라고 증언하였다,

 

 

박정희 시해장면 재연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이후 최태민은 활동이 문제 삼아져서 1980년 초 신군부에 의하여 활동을 못하도록 잠시 강원도로 보내졌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서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또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연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최 목사는 1988년 박정희 기념사업화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헤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 이라며 두둔하였다,

 

한편 박근혜 관련 의혹을 파헤친 '안철수등의 한판 승부-박근혜 벗기기'

(이상윤 저, 높은새 출판사 ISBN 978-89-93989-04-5)의 박근혜 남자문제편에 따르면,2011년12월 현재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 관련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 백광현검사와 신모 수사관은 살아있다고 한다.

 

 

[출처] 박근혜와 최태민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며 당시 대통령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최태민은 1994년 사망           작성자 pentat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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