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ilverstone236 2015. 2. 9. 13:47

외신기자들, 이명박이 누구지?

 

 

 

각국 대통령 또는 총리의 회고록들. 왼쪽 위부터 조지 부시의 <결심의 순간들>, 로널드 레이건의 <어느 미국인의 삶>, 빌 클린턴의 <나의 삶>, 지미 카터의 <신념을 지키며: 대통령의 회고록>, 율리시스 그랜트의 <율리시스 그랜트의 개인회고록>(이상 미국 전 대통령),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의 <아시아를 위한 새로운 흥정>,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의 <운명의 딸>,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의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아마존 갈무리

 

 

정문태의 제3의 눈


(39) 대통령의 회고록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외신기자라는 직업 탓에 오다가다 대통령이나 총리들 회고록을 끌어모은 게 대충 훑어봐도 한 서른 권쯤 꽂혀 있다. 그것들을 끝까지 다 읽은 기억도 없지만 딱히 남는 것도 없다. 그것들은 나올 때마다 기대를 부풀렸지만 결론은 늘 꼭 같았다. 실망! 그 숱한 실망을 통해 내가 느낀 자서전이니 회고록의 성공 비결은 딱 하나다. 정직함이다. 그게 대통령이나 총리쯤으로 넘어가면 공적 영역이 되고 마땅히 역사적 사실을 보증해야 한다. 근데 그것들이 지금껏 제 자랑이나 변명만 줄줄이 늘어놓고 정적을 때려대는 도구 노릇을 했으니 사료적 가치로 아무런 믿음을 못 줬다. 치명적인 결함 하나 더, 그것들은 하나같이 문학적 맛마저 없었다. 그러니 책꽂이 뒤칸에 꽂혀 천덕꾸러기로 지낼 수밖에. 회고록이란 것들이 내겐 그렇다는 말이다.

 

회고록 업계에도 상도덕 있어

 

그것들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당했던 리처드 닉슨의 <리처드 닉슨 회고록>(The Memoirs of Richard Nixon)이었고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 들머리까지 갔던 빌 클린턴의 <나의 삶>(My Life)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공통점을 지녔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진실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읽었던 그것들은 다 그랬다. 내 독서 인생에 최악을 꼽으라면 바로 그것들이다. 게다가 자기방어와 합리화만 날뛰는 그것들은 무엇보다 정서적 교감이 어려웠다. 회고록이란 것들이 전직 대통령이니 총리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사실은 거의 모두 허깨비필자(ghost writer)들의 2차 가공품인 탓이다.

 

희대의 주전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이 회고록 <어느 미국인의 삶>(An American Life) 출판기념 기자회견에서 “빼어난 책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도 읽을 것”이라고 밝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허깨비 저술을 인정한 건 차라리 용감하기라도 했다. 마찬가지로 8년 임기 동안 온갖 거짓말에다 온 세상을 전쟁판으로 몰아넣었던 조지 워커 부시가 회고록 <결심의 순간들>(Decision Points)을 손수 썼으리라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미첼이라는 20대 젊은이 작품이란 게 드러났을 때 오히려 안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글이란 건 제아무리 미문이라도 다른 사람 손을 거쳐 나오면 혼이 빠질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도 줄기차게들 회고록을 내고 있다. 대통령 회고록을 유행시킨 미국뿐 아니라 한국 대통령들도 청와대를 떠나기 무섭게 회고록들을 쏟아냈다. <윤보선 회고록> <김영삼 회고록> <노태우 회고록>에다 이번에 이명박의 <대통령의 시간>까지 튀어나왔다. <김대중 자서전>과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은 사후에 나왔다.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는 회고록 없이 사라졌고 전두환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하기야 전직 대통령들이 거짓 없이 역사를 기록하고 재미난 문장들로 시민한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조건만 갖춘다면 굳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원칙도 그렇다. 표현의 자유란 게 대한민국에서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는지야 의문이지만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든 책을 낼 수 있다. 일산 고서방도 삼청동 박가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시민 이명박이 회고록을 냈다고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회고록 업계에도 상도덕이란 게 있다. 내가 볼 때 이명박 회고록은 제목에서부터 탈이 났다. <대통령의 시간>이란 제목이 말썽의 뿌리로 일찌감치 난타전을 예고한 셈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를 지낸 자들이 내는 회고록 제목에는 ‘대통령’이니 ‘총리’란 단어를 쓰지 않는 게 이 바닥 전통 같은 것이었다. 대통령이나 총리쯤 했던 자들이라면 굳이 그런 직책 없이 이름만 달아도 모두가 알아본다는 자존심에다 충돌 가능성을 지닌 현직 대통령이나 총리들을 배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회고록들이 웬만해선 현직을 건드리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전통은 회고록을 쓴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보통 시민으로 잘 되돌아갔다는 겸손함을 보여주는 장치다.

 

동서고금 그 흔해빠진 대통령이나 총리 회고록들 가운데 이명박 이전에 제목에다 대통령이니 총리란 단어를 써먹었던 건 지미 카터 회고록 <신념을 지키며: 대통령의 회고록>(Keeping Faith: Memoirs of a President)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인권외교 탈을 쓴 채 니카라과,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에서 온갖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불법 비밀전쟁을 벌였던 카터는 자신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란 사실이 불안했을 법도 하다. 실제로 미국에서 카터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도 하니. 이명박 회고록 제목이 대통령을 강조했던 까닭을 되씹어볼 만하다.

 

한국 대통령들 회고록도 다 그런 단어는 피해갔다. 노무현 사후에 낸 회고록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에 붙은 ‘대통령’이란 건 남이 기린 헌정의 뜻이니 경우가 다르겠고. 아시아 쪽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을 빼고 나면 회고록을 낸 대통령이나 총리가 그리 많지 않지만 시중에 나온 것들 가운데 대통령이니 총리 같은 단어를 제목에 건 경우는 없다. 예컨대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 회고록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From the Third World to First)나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 회고록 <아시아를 위한 새로운 흥정>(New Deal for Asia) 그리고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자서전 <운명의 딸>(Daughter of Destiny: An Autobiography)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에선 이명박 평가가 높다고?
훈센이나 샤나나 이름 알아도
이명박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아직껏 단 한 명의 외신기자도
“이명박” 또박또박 부른 이 못봐

왜 ‘대통령의 시간’이라 했나
제목부터 탈 난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이나 총리 단어 거의 안 써
미국서 가장 인기 없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 회고록이 유일

 

‘이명박 동아리’의 용기

 

“국정의 연속성을 위해 다음 정부에 참고 되도록 집필했다.” 듣자니 이게 저자 이명박이 내세운 집필 동기였던 모양이다. 국정의 연속성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회고록 따위가 그런 거창한 일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내세운 제목이 <대통령의 시간>이었다. 저자 이명박은 여전히 대통령 환상에 젖어 시민으로 무사귀환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제목이 내겐 아주 교만스레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의 시간>을 놓고 청와대가 발끈한 것도 좋은 본보기다. 권력의 속성과 충돌한 셈이다. 비록 저자 이명박의 도움을 받아 청와대로 들어갔지만 그건 옛날 일이고 대통령이 둘일 수 없다는 뜻이다. 청와대 속내야 알 길이 없지만 내용보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열 받지 않았나 싶다.

 

 

 

 

그 <대통령의 시간>을 내겠다고 열 명도 넘는 전직 참모들이 1년 가까이 매주 모였다는데 대체 무슨 공부들을 했는지? 회고록보다 오히려 저자 이명박 동아리가 참 궁금하다. 그 회고록 집필을 총괄한 전 청와대 홍보수석 김두우는 “회고록은 참회록이 아니기 때문에 자화자찬적 요소가 들어갈 수 있다”고 떠들었던 모양이다. 여기 저자 이명박 동아리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듯싶다. 동네 이서방 회고록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을 써먹으면서 내는 회고록은 공적이어야 한다. 대통령은 공적 기관이지 개인이 아니다. 게다가 자서전(회고록)이라는 장르는 전통적으로 고백, 회한, 반성을 바탕 삼아 경험에 이르는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면서 독자들한테 심판받는 특성을 지녔다. 그 절대 조건이 바로 정직함이고 그래서 저자들한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장르다. 회고록이 자화자찬이나 늘어놓는 장르가 아니라는 말이다. 회고록이 자랑질이나 하고 변명질이나 해댄다면 결국 장르의 특성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으로 드러났다. 보라. 오죽했으면 저자와 한패인 정당 안에서도 서로 삿대질이 오가겠는가. 대통령 회고록 같은 게 나오면 반대당이나 언론이나 비평가들이야 물어뜯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처럼 같은 편에서 난리치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서로 감추고 우겨야 할 만큼 켕기는 게 많다는 뜻이지만, 아무튼.

 

그러더니 그 전직 홍보수석은 한술 더 떠 “외국에서 먼저 출간 얘기가 있었고..., 외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고도 했던 모양이다. 이제 <대통령의 시간>이 외국까지 들먹이며 날아다니는 꼴인데, 어느 외국에서 누구 평가인가? 외신판은 즉각 반응하는 곳이다. “마하티르” “아베” “훈센” “메가와티” “샤나나”처럼 전·현직 총리나 대통령 이름들을 외신판만큼 자주 불러주는 데도 없다. 근데 나는 아직껏 단 한 명 외신기자도 “이명박”을 또박또박 부르는 이를 본 적 없다. 이명박이 현직에 있을 때도 모두들 “한국 대통령”이라고만 했다. 아무도 이명박을 모른다는 뜻이다. 국제사회에서 캄보디아 총리 훈센이나 동티모르 총리 샤나나 구스망은 알아도 이명박을 아는 사람은 그야말로 흔치 않다. 외신판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그 이름을 어느 외국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한단 말인가?

 

이명박 동아리의 자화자찬은 그렇게 회고록 안팎에서 끝이 없다. 근데 이명박이 왜 굳이 회고록이라는 장르를 택했는지 궁금하다. 자화자찬과 변명에 더 편한 콩트나 일기, 수필, 만화 같은 장르도 있다. 꼭 쓰고 싶다면 목적에 어울리는 장르를 잡는 게 좋다. 또 다른 전 홍보수석 이동관은 “진짜 정치적으로 민감한 얘기나 남북관계에서 진짜 중요한 얘기는 아직 잠겨 있다”며 회고록 제2탄으로 으름장을 놨다는데 참고했으면 한다.

이런 이명박 동아리가 용감한 건지 염치가 없는 건지 뭘 모르는 건지 참 헷갈린다. 회고록과 안 어울리는 동아리인 것만큼은 분명한데.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마지막 봉사

 

 

 

사실은 회고록 같은 걸 안 써도 그만이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반드시 회고록을 쓸 것까진 없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 대통령들도 다 회고록을 남긴 건 아니다. 빼어난 문장가로 이름 날렸던 대통령들이 오히려 회고록이 없다.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암살당했고 우드로 윌슨은 재임 중 뇌졸중으로 죽어버렸다. 달리 미국 대통령 회고록 가운데 최고로 꼽혀온 <율리시스 그랜트의 개인회고록>(Personal Memoirs of U. S. Grant)을 낸 율리시스 그랜트는 정작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조용하게 사라지는 것도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봉사로 괜찮을 것 같다. 앞선 대통령 하나쯤 잡아먹었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시민들은 어차피 회고록 따위로 대통령을 평가하지 않을 테니.

 

 

<출처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