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ilverstone236 2015. 8. 18. 20:22

당신들은 국민이 그렇게도 우스운가


<손석춘 칼럼>'헬조선'의 시대, "역사인식 부족' 저들의 언행에 구토가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은 어쩌다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국민이 되었는가."


내가 읽어 온 신문 글 가운데 국민을 가장 어리보기 삼은 글이다. 저 문장을 쓰기란 쉽지 않다. 평소 '국민'을 어떻게 여기는지 뚝뚝 묻어난다. 곧 이은 문장은 놀랍다. "역사를 왜곡한다고 일본이나 중국을 지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으로 태어났는가를 스스로 상기하며 만국 앞에 기리는 일이다."


글쓴이는 KBS 이사장을 지내고 이사 후보에 선임돼 이사장에 연임될 가능성이 큰 이인호씨다. 그는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제하의 시론에서 KBS 이사장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의 '대박'을 따와 다음과 같이 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이 국적 없는 통일지상주의의 유혹을 몰고 왔다. 우리가 이념적·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는 순간 통일은 민족 전체의 해방과 복리의 증진을 의미하는 '대박' 대신 노예의 길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망각하고 마치 대한민국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는 망상에 젖어드는 현상마저 일어난 게 사실이다."


이인호는 칼럼 뒤에 자신을 "서울대 명예교수, 전 주러시아대사"의 직함으로 표기했다. 궁금하다. '대한민국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는 망상'에 젖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어진 글을 보면 그는 자신을 '러시아 대사'를 비롯한 '요직'에 임명한 과거 정권을 살천스레 겨누고 있다. 동시에 KBS 이사장으로 임명한 현 정권의 언어를 재임명 시기에 구사하고 있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며 처신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과연 지나친 평일까.

 

 

도리 없이 그의 조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명색이 사학자인 그가 솔직히 인정만 했어도 넘어갈 일이지만, 친일 언행이 또렷해 그가 좋아하는 '국가기관'에서 친일파로 규정한 할아버지가 친일하지 않았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있다.

 

(좌부터) 이민호 KBS 이사장, 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그래서일까. 국민을 훈계하는 글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성찰마저 없다. 그는 해방보다 건국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며 "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일본군 위안부로 유린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를 묻고 있다. 몰라서 묻는가. 독립운동에 애면글면 나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섟에 되레 친일에 나선 자신의 조부 이명세를 비롯한 친일파들 책임이 크다.


그럼에도 조부가 친일파 아니라고 우겨대는 그가 국민에게 오만한 훈계를 한다. "역사를 왜곡한다고 일본이나 중국을 지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일" 운운하는 대목에선, 그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문창극의 '일본군 위안부를 더는 거론하지 말자'는 논리는 물론, 대통령 동생 박근령의 망언이 읽혀진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얼마나 한국을 도와주었는지) 국민들이 잘 모른다"며 "대통령께서 하실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가늠하고 제가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아버지 친일파 김용주의 친일 망언 기사들
 

그 뿐인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국민 훈계'에 가담했다. 그는 "그 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를 너무 크게 생각했다. 이제는 공만 봐야 한다"고 부르댔다.


중앙일보는 이인호의 글과 함께 쿠데타 주모자인 김종필의 회고록을 빌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박정희 동상은 물론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발언을 부각했다. "국민이 존경과 고마움을 가지고 동상을 올려다볼 날이 올 것"이라는 말도 물론 포함됐다.


어떤가. 저들이 대한민국 국민을 그렇게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남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는 시공간에서 제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침략자의 장교로 활동했던 사람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제 조부의 명백한 친일을 친일이 아니라고 눈 부라리는 '서양사학자'를 뜬금없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이사장 자리에 낙하산으로 거푸 앉히는 데도 비판 여론은 마치 트집 잡기처럼 치부되고 있잖은가.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와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해방 70년을 맞았는데도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 국가기간방송인 한국방송의 이사장 자리에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머리 조아렸던 사람들의 후손이 앉아 국민을 훈계하는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그들이 앞 다퉈 찬양하는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부르는 젊은이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인식 부족' 탓으로만 여기는 저들의 언행에 구토가 밀려온다. 각각 권력과 부가 따르는 자리들을 내내 누려오며 잘 먹고 살아서일까. 나라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현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정치경제 체제 때문이라는 책임의식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참 씁쓸한 해방 70년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탐욕스런 저들의 치하에서 살아야 하나.



<출처 : 미디어오늘·손석춘 칼럼>